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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14일 광주 현대예식장에서 8살 연하인 처 윤성희 와 결혼
1981년 8월 11일 낮 12시반에 포항 성모병원에서 딸 김 경현 태어남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셋째 누나집 2층에 세들어 사는 새댁(처형)의 동생이 서울에서 내려 왔는데 언뜻 보기에 참한 것 같으니 내려와서 선을 보라는 연락을 받고 그 주 토요일 오후 광주를 가기 위해 포항을 출발하여 경주 고속버스 터미날에 가보니 광주고속 사정에 의하여 광주행은 무기한 운행을 정지한다는 방이 붙어 있었다. 대구로 갔다. 대구고속버스테미날에도 같은 내용이 게시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대학친구인 삼식이를 만나 사정을 들어보니 국내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산에서 잡히는 일본 NHK 뉴스에 의하면 광주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으로 우리 국군에 의해서 광주는 봉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 6월 광주 봉쇄가 풀리고 우린 선을 보았다. 두 번째 양가가 모여 식사를 하고 세 번째 사진관에서 약혼사진을 찍고 네 번째 결혼날을 정하고 폐물을 맡기고 다섯번째 만남이 1980년 9월14일 예식장에서 였다.

 

이렇게 하여 노총각은 도둑놈 소리를 들어가며 23살의 어린 신부를 만나 1980년 9월 13일 광주 현대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직장 동료들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놀려댔지만 나는 결혼 후 회사와 집 사이를 정시 출발 도착하는 출퇴근 열차를 타고 시계추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신혼 6개월여가 지난 어느 봄날 퇴근을 하려는데 당시 직속상사인 장모 과장께서 자기 차를 타고 같이 퇴근하자는 제안에 빨리 집에 갈 욕심으로 선뜻 응했는데 아뿔싸 이 차가 회사 주택단지로 곧장 가는 게 아니라 포항 시내 술집을 들렸다 가는 차였다.

 

그날 밤 총각 때 늘상 그랬드시 술집을 서너군데 들러 결국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전화가 귀한 시절이라 미리 연락할 방법도 없어 꼼짝없이 집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어 버렸다. 집사람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아침에 미리 얘기해 주면 불안하지나 않을 걸, 등등 불평을 토로했고 결국 첫 번째 부부싸움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며칠간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집사람은 회사에서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퇴근하다 교통사고를 당하지는 않았나 등등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퇴근 길목에 나와 기다렸다고 한다.

 

집사람이 그날 이후 며칠간 말없이 지내면서 느낀 감정을 원고지에 옮겨 회사 월간지인 '쇳물'지에 '남편을 해방시키자'라는 타이틀로 기고하여 실리는 바람에 한때 유명인사가 되었다. 요지는 부부싸움 등으로 남편을 힘들 게 하면 결국 회사일이 순조롭지 못할 것이니 남편을 해방시켜 주어 근무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노총각은 구제되고 23살의 어린 신부와 함께 우리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시작되었고 1981년 8월11일 아빠 엄마를 쏙 빼닮은 사랑스런 딸 경현이가 태어났으며,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다.

 

열렬한 사랑끝에 태어난 딸이어서 그런지 엄마 아빠의 장점만을 쏙 빼어 닮아 총명함과 끈기, 미모를 두루 갖춘 어였한 숙녀로 성장하였고 결혼 25주년을 맞이한 2005년 기족사진도 촬영하였고, 2010년 7월 7일은 나의 회갑날이고 9월 14일은 결혼 30주년을 맞는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기념일을 맞을 것이다.